익산 왕궁리 유적은 겉으로 보면 넓은 잔디밭에 석탑 하나가 서 있는 곳이다. 1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어 "볼 게 없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이 빈 땅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이 이어지는 자리이고, 그 아래에서 나온 것들 때문에 백제사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달라진 곳이다.
이름은 왕궁리인데 성격은 오래 헷갈렸다. 땅 위에 남은 것이 오층석탑뿐이라 절터로 보는 시각이 길게 이어졌고, 마한의 도읍·무왕의 천도지·별궁·후백제 견훤의 도읍까지 설이 갈렸다.
발굴이 방향을 정했다. 절에는 있을 이유가 없는 것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위계가 뚜렷한 대형 건물터, 조경을 갖춘 정원, 금과 유리를 다루던 공방, 그리고 많은 인원이 상주해야 필요한 규모의 화장실이다. 지금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 대에 궁성으로 지어졌다가 뒤에 사찰로 바뀐 자리로 본다.
한 자리에 궁궐과 절의 흔적이 겹쳐 있다는 점이 왕궁리를 다른 백제 유적과 갈라놓는다.
| 확인된 시설 | 무엇을 말해 주나 |
|---|---|
| 대형 건물터 | 일반 주거가 아닌 위계 있는 공간. 왕궁설의 근거 |
| 정원 유구 | 조경을 갖춘 곳. 백제 정원 유적으로는 이곳이 대표 사례 |
| 공방 시설 | 금·유리를 다루던 생산 공간. 왕실 수요를 짐작하게 한다 |
| 대형 화장실 | 다수가 상주했다는 증거. 기록에 남지 않은 생활사 자료 |
| 둘레의 담장 | 직사각형으로 구역을 두른 계획된 배치 |
| '수부(首府)' 명 기와 | 익산에 중앙 행정기구가 있었음을 가리키는 글자 |
궁궐을 두른 담장은 동서 약 245m, 남북 약 490m 규모다. 세로가 가로보다 두 배 긴 직사각형이다.
안이 어떻게 나뉘었는지가 흥미롭다. 남쪽에는 의례와 정치에 쓰인 건물이, 북쪽에는 쉬는 공간인 정원과 물건을 만드는 공방이 놓였다. 앞은 공적인 구역, 뒤는 생활과 생산 구역으로 갈린 셈이다. 즉흥적으로 늘려 지은 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해 구획한 공간이라는 근거가 된다.
지금 걸을 때 이 배치를 염두에 두면 방향 감각이 생긴다. 석탑을 지나 북쪽으로 갈수록 밟고 있는 땅이 정원과 공방이 있던 자리다.
유적 한가운데 선 왕궁리 오층석탑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1965년 해체 수리 때 파묻혀 있던 기단부를 원래 모습으로 되살렸다.
이 탑이 흥미로운 이유는 양식이 한 시대로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백제 석탑의 특징을 지녔다는 견해와, 백제 양식을 이어받아 뒷시대에 세웠다는 견해가 함께 있다.
탑 앞에서는 두 가지를 보면 좋다. 지붕돌이 얇고 넓게 뻗어 나간 선, 층이 올라가며 줄어드는 비율이다. 해체 과정에서 탑 안에 있던 사리장엄구가 함께 나왔고, 금제 금강경판과 유리 사리병 등은 국보로 지정됐다. 실물은 유적 옆 박물관에 있으니 탑을 보고 이어 보면 순서가 맞는다.
가장 자주 회자되는 발굴 성과는 화려한 유물이 아니라 화장실 유구다. 궁성 서북편 낮은 땅에서 나왔고, 여러 칸이 이어진 형태에 오물을 처리하는 구조까지 확인됐다.
중요한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그만한 규모가 필요했다는 것, 곧 상주 인원이 상당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백제 사람들의 일상 위생을 실물로 보여 준다는 점이다. 왕의 이야기는 기록에 남지만 생활은 대개 남지 않는다.
유적 옆 백제왕궁박물관에서 발굴 성과를 정리해 볼 수 있다. 2008년 왕궁리유적전시관으로 문을 열었고, 2021년 백제왕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뒤 2022년 리모델링과 가상체험관 증축을 거쳐 다시 열었다.
순서는 박물관을 먼저 보는 쪽을 권한다. 바깥의 빈 땅이 무엇이었는지 설명을 듣고 나가면 잔디밭이 지도처럼 읽힌다. 다만 한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실내부터 보고 해가 기운 뒤 바깥을 도는 편이 몸에 낫다. 운영 시간과 휴관일은 익산시 안내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유적 대부분이 트인 잔디밭이라 그늘이 거의 없다. 한낮에 들어가면 석탑까지 걸어가는 것만으로 체력이 빠진다.
여름에 챙길 것은 나들이 장비에 활동별로 정리해 뒀다.
왕궁리 유적은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이 지구는 공주 2곳, 부여 4곳, 익산 2곳으로 묶여 있다.
여기서 왕궁리를 이해하는 열쇠가 나온다. 백제의 도읍은 공주에서 부여로 옮겨졌는데, 익산에는 왕궁과 대규모 사찰이 함께 남아 있다. 도읍이 아닌 곳에 이런 조합이 남은 이유를 두고 천도설과 별도설이 갈린다.
익산에서 함께 등재된 다른 한 곳이 미륵사지다. 왕궁리가 생활과 정치의 공간이라면 미륵사지는 신앙의 규모를 보여 주는 자리라, 두 곳을 같은 날 보면 무왕 시기 익산이 어떤 곳이었는지가 또렷해진다. 같은 백제 왕도인 공주까지 묶으면 도읍이 옮겨 간 흐름이 이어진다. 전북의 다른 여행지는 전북특별자치도에 모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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